2019년 11월 26일의 주제시, 이바리기 노리코의 <자기 감수성 정도는>입니다.

 

 

 공감이 많이 되는 시였고 간단히 요약하면 외부 환경, 요인을 탓해 자기 기분이나 마음, 그리고 중심을 잃어가는 사람들에게 정말 기분 나쁘지 않게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시였습니다.

 

 

 어릴 적 모든 일에 이유는 있고, 근거를 설명하는 것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을 했지만 사회에서는 무슨 사건, 특히 잘못이나 책임 질 일에 대해서 이유를 궁금해 하기보다는 결론, 결과에 대해서만 집중하였습니다. 상대방이 궁금해하지 않는 저의 결과에 대한 근거와 과정은 핑계일 뿐이었습니다. 사회에서(특히 군대) 그런 경험을 많이 하게 되며 과정이나 이유를 물어보지 않는 경우에는 저 또한 핑계라고 생각하여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. 어찌 보면 슬픈 이야기일 수 있지만, 저는 이게 저를 단단하게 만들어줬다고 생각합니다. 

 

 더이상 핑계를 대지 않고 이야기하고 행동할 수 있었으며, 이 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 감수성 정도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. 그리고 환경을 탓하거나 내부를 탓하기보다 결론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불평할 시간에 핑곗거리를 줄이는데 집중하게 되었습니다.

 

 

 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저에게는 유독 공감이 되었던 시 필사 사진입니다.

 

 

다시 쓰고 다시 봐도, 공감됩니다.

 

세상에 자기 감수성 정도도 스스로 정하지 못하는 바보들이 조금이라도 적어지길 바라며, 어른다운(?) 어른이 많아지길 바라며, 공감을 하면서도 출산률이 혼인율(?)이 낮아지는 것은 나라 탓이라는 생각을 조금을 하는 저 스스로에게 모순됨을 느끼며, 이런저런 잡생각이 많아진 오늘의 다시 쓴 시 <자기 감수성 정도는>이었습니다.

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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